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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STAKOVICH - JAZZ SUITE NO.2

아르페지오 오디오샵 2010. 9. 9.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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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 니콜 키드먼이 파티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왈츠를 추는 장면에서 나왔던 곡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에는 '텔미썸씽' 과 '번지점프를 하다'에 삽입됐던 곡입니다. 러시아 분위기의 장중하면서도 색다른 왈츠, 정말 매력적입니다.
처음 보는 악보를 거침없이 완벽하게 연주하는 재능과 감탄할 만한 기억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1번’으로 이미 18세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쇼팽 콩쿠르 수상 경력이 있는 탁월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지만, 음악적 호기심과 실험 정신도 강해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Riccardo Chailly /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1988-91년 녹음, Decca.

 

 

 
'재즈'라고는 하여도 이 음반에 실린 음악들은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재즈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재즈 모음곡'이라고 이름 붙은 곡들에서조차도 그러합니다. 그저 가벼운 대중적인 음악 장르 어법의 영향을 받았다는 정도일 뿐입니다. 쇼스타코비치는 폐쇄적인 소비에트 체제의 시각으로 걸러진 재즈를 접했을 뿐이기 때문이죠. 그나마 제1모음곡에서 20년대적인 퇴폐성의 그늘이 좀더 느껴지는 편이라면 제2모음곡 같은 작품에서는 오히려 빈 왈츠의 영향이 뚜렷합니다. (제2모음곡의 한 악장인 감미롭고 향수에 찬 '왈츠2'는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재즈' 모음곡이라는 명명이 합당하느냐는 의문을 떠나서, 오히려 이 앨범에 실린 곡들은 눈부시고 위트에 찬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관현악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만합니다. 이 음악들, 특히 그 힘찬 투티 부분들에서 저는 겨우 길들여 놓은 야수와도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왈츠'니 '폴카'니 하는 제목들이 악장마다 붙어 있지만, 그러한 추상적인 형식이 잡아 가둘 수 없는 젊은 쇼스타코비치의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음악입니다. 보다 늦은 시기의 음악들이 포함되어 있는 나머지 두 음반들에서도 어느 정도 이런 인상이 계속됩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삽입곡
 
1983년 여름. 인우(이병헌)는 자신의 우산 속에 뛰어들어온 태희(이은주)에게 반하고 그들은 사랑에 빠집니다. 군 입대라는 이별의 순간이 오고. 서로에게 짧은 이별이라 위로했었지만, 그 순간은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2000년 봄, 이제 어엿한 가장이고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인우는 태희를 느낄 수 있는 제자인 남학생을 사랑하게 됩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중 해변에서 태희와 인우가 춤추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바로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의 재즈 모음곡 2번 중 왈츠II (Jazz Suite No.2 중 Waltz II)입니다. 이곡은 영화 "텔미썸딩"과 "아이즈 와이드 샷"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왜 스탈린 시대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가?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태생으로 그가 삶을 마감했을 때 "공산당의 충성스런 아들인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소비에트 음악의 발전과 사회주의 휴머니즘 및 인터내셔널리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전 생애를 바쳤다.”라고 소련 공산당이 그의 죽음을 추모했을 정도로 러시아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스스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음악의 모토로 삼았으며 초기 그의 작품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중요한 성과로 간주되어 스탈린상을 수상하는 등 당의 권력에 충실했던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색깔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영화의 삽입곡으로 가벼운 왈츠곡이 쓰여 그 이름의 독특함만큼이나 그렇게 위험스런(?) 작곡가로 낙인 찍히지는 않은 것 같다.
소비에트의 약화와 더불어 봇물처럼 쏫아져 나온 여러가지 이야기들 중에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자서전과 언급들이 있었지만 사실 위의 소련 공산당의 헌사가 정치적이었던 것만큼이나 그런 이야기들의 유통과정이나 발언의 진위 역시 다분히 정치적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쇼스타코비치의 사상성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관심은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음악에 대한 창작과 고민에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하여튼 쇼스타코비치는 한마디로 강성한 소비에트 시대에 잘나가던 천재 음악가였다. 그러던 그에게 1934년 초연되었던 오페라 "므쳰스크의 레이디 맥베스" op. 29 가고뇌의 시작으로 다가온다.
인민으로부터는 자유로운 형식미와 표현이라는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지만 스탈린으로부터는 부르주와 취향의 혼돈으로 일관된 작품이라는 신랄한 비판과 함께 상영금지라는 가혹한 처분을 받게 된다.
소스타코비치의 천재성은 다분히 역사적 낙관성에 봉사하는 일률적 형식미에 안주할 수 없었을 것이며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풍미하고 있었던 소위 아방가르드적 음악으로의 실험적 접목이 시도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자신만의 천재성에 기인한 무로부터의 창조성이 스탈린의 귀에는 루카치의 지적대로 시민사회의 몰락을 명시적으로 드러내 주는 아방가르드적 혼란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시대에 이미 아방가르드는 초기의 급진 좌파적 색채에서 일탈하여 인간을 탈사회적, 탈역사적 존재로 환원시켜 역사의 부정을 촉발시키는 아방가르드적 존재론이라는 루카치의 이론이 그 정의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가혹한 당의 조치에 대해 쇼스타코비치는 아마도 많은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는 이로 인해 준비되었던 4번 교향곡을 철회하였으며 3년 후에 "정당한 비판에 대한 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조적 대답"이라는 거창한 부제를 달고 제 5번 교향곡을 발표함으로써 다시금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고 5번 교향곡은 견고한 구조로써 이전의 자유로운 실험적 형식미를 배제시킨 스탈린의 비판을 그대로 수용한 듯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당으로부터는 "불명료한 대답"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1940년 제1회 스탈린상을 수상함으로 이전의 사상적 치욕으로부터의 명예 회복을 하게 된다.
쇼스타코비치의 ‘므쳰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라는 작품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볼 때, 한 개인의 예술적 창작욕이 당파성을 뛰어넘지 못한 채 굴복한 한 예술가의 고뇌와 좌절로써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투철한 사회주의 음악가의 한때 예술적 방황을 낙관적이며 희망적이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회개시킨 소비에트의 사회적 승리로 받아들여야할지는 관점의 문제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시대에 쇼스타코비치에 부여된 자아비판이 단지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음악이 시도되었다는 이유로 아방가르드적 속성을 가졌다는 비판과 무조건적 적대시함에 대한 체념적 반성이었다면, 초기 절대관념에 대한 반항의 시도로써 부르주아 국가관에 철저히 반항했던 아방가르드의 전위로서의 또 다른 면은 철저히 무시되어 버린 스탈린 시대의 희생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더 무서운 사실은 이런 식의 스탈린 시대의 분류적 오류가 여러 곳에 팽배하여 실험적인 것은 예술적인 것이며 예술적인 것은 리얼리즘과 상반되는 반동의 쓰레기라는 낙인을 찍는 작업들이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수행되어져 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진위를 가리는 작업은 상당히 지난한 작업이라 생각하고 일개 음악이나 듣고 느낀 대로 긁적이는 본인과 같은 필부가 할 작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진위와 상관없이 이런 식의 논리적 과정이 이 땅에서 음악을 듣고 말하는데 대단히 해악적인 부분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양성의 스펙트럼을 임의대로 재단한다는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은 그 양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순위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질적 수준은 한심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일개 몇몇 메이저 기획사가 음반 판매량을 좌지우지 하고 있으며, 클럽 중심의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은 그 뜻을 펴지도 못한 채 나가 떨어져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천편일률적이고 낙관적인 사랑 노래들의 히트 성향은 스탈린을 다시금 무덤에서 깨울 정도로 다양하지도 실험적이지 못할 것이다. .
어떤 작가의 유행과 함께 몰아 닥친 ‘재즈’ 열풍은 거의 모든 카페의 간판을 ‘재즈카페’로 갈아치웠고, 전자음악의 경박한 소리에 온 나라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어 대니 노래방 간판까지 ‘테크노’가 되어버리는 나라….그런데 그런 식의 음악의 장르적 상륙은 모두 대공포화를 맞고 다시금 슬며시 간판을 내려야 했다.
왜냐하면 재즈의 전통적인 흑인의 저항과 슬픔은 모두다 태평양에 떨어뜨리고 그 분위기에만 취한 청자는 그냥 멋에 겨웠을 뿐이며 테크노의 발생 그 태초의 막대한 실험정신 역시 대륙을 건너며 모두다 땅에 파묻고 오직 들어온 것은 엑스타시에 그냥 주책없이 흔들어대는 천박함만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어는 나라 어느 사회든지 유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세속성에만 의존한 채 본래 의미로의 접근이 철저히 봉쇄되어 그런 문화가, 그런 다양성이 자리잡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는 경우는 이 땅에서는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의 천박함이 첫번째 원인일 것이며, 돈이 된다면 태양도 팔아먹을 듯한 자본주의의 속성에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었음이 두번째 원인일 것이며, 소위 진보의 탈을 쓴 평론가들이라는 사람들의 절묘한 파시즘이 세번째 원인일 것이다.
이 땅에서 실험적인 음악이 거의 들려지지도 창작 되지 않는 이유는 쇼스타코비치 시대의 스탈린의 유령이 아직도 배회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실험성과 자유로운 형식미를 추구했던 음악은 클라식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음악들에도 있었고 그런 음악들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받아 왔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도무지 평론가들의 비아냥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유는 놀랍게도 스탈린의 비판의 논지와 아주 흡사하다. ‘부르주와’라는 단어를 ‘사치’스럽다는 단어로 바꿔 치기 했을 뿐 스탈린의 논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평론가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 올바른 음악이다.’라는 편견일 수도도 있지만 그런 식의 오류라면 차라리 감성의 다양성이라는 아량으로 용서가 가능하지만 과거 ‘진보’라는 전력을 가진 몇몇 음악 평론가들이 휘둘러대는 펜에 평가절하되고 매도되어버린 대중음악 장르를 생각하면 고뇌하고 있을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 떠오른다.
예술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싸움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부르즈와 취향의 역겨움과 혼돈이 철저히 배격되어지고 비판 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다양한 인간 감성의 스펙트럼을 1930년 식의 스탈린의 논리로 난도질 하는 것은 문화라는 거대한 영역에서 많은 실수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단어 뜻 자체가 전위라는 군대용어로서, 러시아혁명 당시 계급투쟁의 선봉에 서서 목적의식적으로 일관된 집단의 정당과 그 당원을 지칭하였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의미는 다양한 양상을 가진다. 결국 문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역사로 옮기느냐는 인간의 실천의 문제이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참과 거짓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박한 매체와 자본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평론가들의 대중음악에 있어서 실험성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이루어져야 하며 그나마 몇권 나와있지 않은 대중음악 관련 서적에 한국대중음악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요소들은 수정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음악이 좋은 음악이고 나쁜 음악이다라는 이야기는 나중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땅에서 음악듣기는 너무나 편협하고 천편일률적인 주입과 나열만이 있을 뿐이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적 인격은 형성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다양성이란 ‘베이브복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아’의 음악을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는 그런 다양성이 아니다. 서태지가 한국에서 최고의 아티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뫼비우스 스트립’을 발표했던 ‘조윤’이라는 아티스트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문희준이 최고의 보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신아기외 소리”의 김용우’라는 보컬리스트를 소개해 주고, ‘신화’가 우리나라 최고의 그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슬기둥’이라는 매력적인 그룹도 있다고, 또한 ‘Eminem’ 최고의 반항가수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Rage Against The Machine’ 같은 저항그룹도 있다는 사실을, 아니면 ‘Rage Against The Machine’만이 최고의 저항그룹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1970년대 이미 인터내셔날가를 가장 난해하고 실험적이라는 재즈락으로 편곡해서 부른 이태리의 ‘Area’같은 그룹도 있었으며, 실험적인 것과 사상적인 것이 양립할 수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나름대로 진보적인 우리네 고상한 음악평론가들에게 ‘누에바 깐시온’의 기수였던 ‘Quilapayun’ 같은 실험적 진보그룹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 논문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 저자 이득재 1992 사회평론 4호